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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바 이야기 · 1

회기 하나에 네 시간

권영범

베르바 만드는 사람

2026년 10월 9일 · 읽는 데 2분

책상 위에 놓인 헤드폰과 펼친 공책

아내는 50분짜리 회기 녹음 하나를 축어록으로 푸는 데 네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이 걸렸어요.

재생하고, 멈추고, 받아 적고, 몇 초 되감아 다시 들었어요. 두 사람 말이 겹치는 대목은 몇 번이고 되돌려 들었고요.

아내가 상담 수련을 하던 때였어요. 슈퍼비전을 받을 때마다 축어록이 필요했고, 공개사례발표에는 한 회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푼 축어록이 들어가야 했거든요.

저는 상담사가 아니에요. 축어록이 왜 그렇게까지 꼼꼼해야 하는지는 옆에서 지켜보며 알게 됐어요.

그래서 받아 적는 일만큼은 덜어 주고 싶었어요. 조건은 하나였어요. 녹음이 아내의 컴퓨터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 한글 파일을 만든다고 저절로 어딘가에 올라가지는 않는 것처럼요.

첫 버전은 쓸 만한 수준이 못 됐어요. 먼저 써 보신 선생님들이 두세 시간짜리 녹음 초안을 고치는 데 네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 주셨어요. 받아 적던 시간이 고치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너무 오래 걸렸죠.

그때부터 같은 녹음을 여러 한국어 음성 인식 모델에 돌려 보고, 사람이 고친 축어록과 한 글자 한 글자 맞춰 봤어요. 어떤 모델이 어디서 틀리는지 표로 정리해 가며 비교했어요.

녹음을 손보는 방법도 하나씩 시험해 봤어요. 좌우 소리를 하나로 모으고, 음량을 고르게 맞추고, 잡음도 걷어 내 봤는데요. 잡음 제거는 오히려 도움이 안 돼서 뺐어요.

짧은 문장으로 모델을 더 학습시켜 보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긴 녹음에서 결과가 엉망이 됐어요. 그 실험은 접었어요.

웹 버전과 설치형 버전으로 나뉘어 있던 프로그램도 하나로 합쳤어요. 둘을 오가는 게 번거로웠고, 녹음이 길면 글자 하나 고칠 때마다 화면이 버벅였거든요.

기능은 줄였어요. 요약 기능도, 화자마다 상담자인지 내담자인지 자동으로 이름을 붙이는 기능도 뺐어요. 남긴 건 받아 적기와 화자 구분, 그리고 녹음을 들으며 고치기 편한 화면이에요.

그렇게 다듬은 프로그램이 지금의 베르바예요.

아내는 이제 한 회기 축어록을 한 시간 안에 마무리해요. 그 한 시간은 초안을 녹음과 맞춰 보며 고치는 시간이에요.

아내가 하는 말이 있어요. “이제 베르바 없으면 축어록 못 풀겠어.”

아내의 동료 선생님들도 하나둘 쓰기 시작하셨어요.

베르바가 하는 일은 받아 적는 데까지예요. 다시 들으며 자기 말을 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상담자의 몫이에요. 손으로 직접 풀어 보라고 권하는 슈퍼바이저나 수련 기관도 있고요.

내담자에게 녹음 동의를 받는 일도 상담자가 직접 하셔야 해요. 프로그램이 대신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받아 적는 일은 베르바가 하고, 다시 듣는 일은 아내가 해요. 처음 만들 때 바란 것도 딱 거기까지였어요.